신영복 | 돌베개 | 1996년 9월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살다 보면 가끔 괜찮다는 다독임보다 따끔한 한마디가 큰 위로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는 그 위로를 신영복 선생님의 <나무야나무야>에서 찾았다.

이 책은 신영복 선생님이 20년간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특별 가석방된 후 8년 만에 출판한 책이라고 한다. 글의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러한 주제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사연이 깃든 곳을 직접 찾아가면서 적어간 25편의 글이다. 중간중간 신영복 선생님이 직접 찍은 사진과 그린 그림이 들어있었는데, 그분의 글과 그림이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야나무야>는 신영복 선생님의 에세이로, 산과 물을 만나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되어있다. 시대의 모순을 고뇌하고 현실의 추한 구석을 쿡쿡 찌르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진지한 애정과 성찰을 담고 있었다. 내 생각 너머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멋진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머리’의 조화입니다.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이성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사람은 비로소 개인적으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간’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한 탐닉이 됩니다.” (원문 중)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 갑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고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원문 중)

마음이 좀 더 따뜻해지고 가슴이 좀 더 넓어지고 호흡이 좀 더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결코 느긋하게 살아도 돼 하는 위로가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어른의 호통으로 들렸다. 아이러니하게 그게 오히려 큰 위로가 되었다. 

전편을 통틀어 나를 가장 크게 흔들었던 이야기를 꼽으라면 아마 이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피를 팔아 그 돈으로 동생들의 끼니를 사 집에 들어가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어둑새벽 대학병원 수도꼭지에서 양껏 찬물을 들이키는 친구, 물을 타서 좀 더 많은 피를 팔려고 했던 친구. 그는 그가 들이킨 물이 곧장 혈관으로 들어가 물 탄 피를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을 애써 숨기려 하였다. 도살장에서 소의 입을 벌리고 강제로 물을 들이키게 하는 사람도 있고 불량상품을 만들어 내놓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자기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당당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당당함이 오히려 그의 부끄러움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설령 그가 들이킨 새벽 찬물이 곧바로 혈관으로 들어가 그의 피를 함량미달의 불량상품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얻은 부당이득의 용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원문 중) 

“없이 사는 사람들의 (영리하지 못한) 외형이 파렴치하고 거친 부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합법적인 불법”을 저지를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픈 가책에 대해서도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비좁은 사실로부터 좀 더 넓혀진 진실을 들여다보게 될 때 우리는 믿고 있던 삶의 기준이나 좋아라 꼽는 가치들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알게 된다.

삭막해져 가는 현실 속 일상에 정신적 풍요로움을 나눠줄 수 있는 어른이 있음으로 느끼는 안도와 희망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삶의 성공’도 있음에 위로를 받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어른이 되어야지 생각하게 되는 하루다.

이분선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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