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 더숲 | 2018년 1월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부터 프랑스의 무명 시인, 아일랜드의 음유 시인, 노르웨이의 농부 시인과 일본의 동시 작가 등의 시 56편이 실려 있다. 매 편 간략하게 시인의 삶과 시인이 살았던 사회, 시대 이야기 그리고 시가 쓰인 배경을 소개한 후 엮은이의 해설을 덧붙였다. 

시가 아직 낯설거나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시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징검다리 같은 책이라고 할까. 친절한 해설이 혹 방해가 된다 싶을 때는 살짝 건너뛰면 된다. 56편 중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았던 시 몇 편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한 가지 기술> -엘리자베스 비숍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상실을 경험한다. 상실은 예고되지 않으며 겪었다고 해서 면역이 생기지도 않는 듯하다. 상실 앞에서 우리는 흔히 분노하고 슬퍼하고 좌절한다. 시인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기에 그럼에도 그것은 재앙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시인이며 소설가인 엘리자베스 비숍(1911~1979)의 삶은 상실의 연속이었다. 성공한 건축가였던 아버지는 일찍 죽고, 병약한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 질환을 앓다가 다섯 살의 비숍을 남겨둔 채 정신병원에 영구 격리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비숍이 청혼을 거절하자 연인이 자살했다. 이후 천식, 알코올중독,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의 유산 덕분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모로코 등지를 여행한 비숍은 동성 연인인 탐미주의자인 건축가 로키 수아레스와 브라질에서 15년간 살았다. 이 시기에 생애 최초로 안정감과 행복을 느낀다. 두 사람의 사랑은 브라질 감독 브루노 바레토에 의해 (드문 꽃들 Flores Raras) 한국어 제목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어떤 것을 알려면> - 존 모피트 

우주여행이 꿈에서 현실이 되고, 인공지능이 빠르게 똑똑해지고 정교해지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어쩌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무언가 제대로 알려고 하기보다는 빠르게 알아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무엇을 알고자 한다면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이것은 사랑과 다르지 않다.
무언가로부터 '흘러나오는 평화'를 만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진정 자유로워야 하는 것인지.

존 모피트(1897~1989)는 생을 마칠 때까지 60년 동안 미국 워싱턴주의 캐슬록에 은둔해 살며 시를 쓰고 숲을 가꿨다. 주위의 많은 학교와 자선단체들이 매년 그의 기부를 받았지만, 그가 철저히 익명에 부쳤으므로 사후에야 그 사실이 알려졌다고 한다.

<납치의 시> 니키 지오바니 

인생에는 분명 이런 황홀하고 로맨틱한 사랑의 시간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납치한 시인은 자신의 시구와 운율에 연인을 집어넣고 롱아일랜드 해변으로 가거나 아니면 냅다 집으로 간다니...아, 얼마나 아름답고 치명적인 납치인가.

미국 시인 니키 지오바니(1943~)는 몸이 약해 결석이 잦았던 덕분에 집에서 독서에 파묻힐 수 있었다. 흑인 시민운동에 앞장서서 알려졌으며, 사랑과 성, 분노, 슬픔, 인종, 정치권력, 폭력 등을 아우르는 시를 써 왔다.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의 25명의 '살아 있는 전설'에 지오바니를 포함하기도 했다.

독일 시인 파울 첼란(1920~1970)은 이렇게 썼다. 

시는 일종의 '유리병 편지'와 같다.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의 해안에 가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시인이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 말이다.

그렇다, 누군가의 마음 해안에 닿은 시는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 혹은 서늘한 깨달음이 되기도 하고 뒤처져 있는 누군가 앞으로 세차게 나아가게 하는 자기 안의 힘을 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시만의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마지막으로 터키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 일부로 책 소개를 끝마치려 한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오세방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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