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자런 | 알마 | 2017.2.


‘랩 걸’은 사진과 같이 식물 세밀화 그림으로 겉장을 두르고 있다. 식물의 몸피 같은 초록의 겉장을 넘기면 아이보리색 종이 위에 깨알 같은 식물들의 비밀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것은 연구하며 성장해간 화자이자 작가인 호프 자런의 성공 스토리이기도 하다. 

자기의 일이지만, 남의 이야기를 하듯 넉살과 진지함을 넣어 꼭 알맞게 버무린 그녀의 문장 솜씨 또한 샘을 낼만 하다. 자런과 함께 중요한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그의 연구 파트너이자 유일한 절친 ‘빌’ 과의 우정과 신의의 초월적 가치는 다른 방법으로 이를 수 없는 곳까지 가 보는 희열을 준다.

온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도축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고향에 돌아가 한 남자의 아내로 살지 않겠다는 목표는 끊임없이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게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자런은 전쟁을 위한 과학을 선호하는 학계에서 연구비를 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식물학 연구를 위한 현실적 절충으로 인해 2배에 달하는 연구시간을 견뎠지만, 예정되었던 종신교수의 자리는 임신을 트집 잡혀 자격정지 당한다. 남성 중심적 세계에서 그녀는 제대로 경기를 끝까지 펼쳤고,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달릴 대로 달린 멋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랩 걸’을 소개했던 유시민은 이 책을 읽고 ‘딸이 살아갈 미래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했다. 나 역시도 호프 자런의 자전적 여정에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인류를 밝은 쪽으로 고양할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모든 분을 응원하며, 책 속의 문장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집에 오면 나는 여전히 엄마와 함께 정원을 가꾸고 책을 읽었지만, 우리가 하고 있지 않은 일이 무엇인가 있다는 걸 막연히 감지했다. …. 엄마와 딸로 산다는 것은 뭔지 모를 원인으로 늘 실패로 끝나고 마는 실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바로 내 진정한 잠재력은 내 과거나 현재의 상황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내 의욕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 부모님께 전화하지 않은 것, 아직 납부하지 못한 신용카드 고지서, 씻지 않고 쌓아둔 접시들, 면도하지 않은 다리 같은 것들은 숭고한 발견을 위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가 함께 일해온 지난 15년의 역사가 메아리처럼 두 사람 사이에 울려 퍼졌다. … 빌은 내가 약한 부분에 강하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할 때 완전하다. 우리 둘은 각각 필요한 것의 절반은 바깥세상에서 얻고 나머지 절반은 서로에게서 얻는다.

-씨앗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대부분의 씨앗은 자라기 시작하기 전 적어도 1년은 기다린다. 체리 씨앗은 아무 문제 없이 100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각각의 씨앗이 정확히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그 씨앗만이 안다. 씨앗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 그 기회를 타고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 듯 싹을 틔우려면 그 씨앗이 기다리고 있던 온도와 수분, 빛의 적절한 조합과 다른 많은 조건이 맞아떨어졌다는 신호가 있어야 한다.

최승진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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