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 태학사 | 2000.05.12


박제가, 국사 시간에 배운 짧은 나의 지식 속 그는 18세기 실용주의 학자, 서얼 출신, <북학의>의 저자로만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박제가의 새로운 면모를 접하게 되었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으로 조선의 현실에 불만을 가득 안고 살아갔던 비운의 학자요, 당파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는 관습에 대해 일침을 주저하지 않는 ‘이단아’였다. 그의 솔직하고 담백한 글을 <궁핍한 날의 벗>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30여 편으로 구성된 산문집이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언제나 입에 붓을 물고 다녔다. 측간에 가서는 모래 위에 글씨를 썼고, 어디에고 앉으면 허공에 글씨를 썼다. (…) 무릎과 배꼽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먹물이 만들어졌다.” 

책의 첫 글 “어린 날의 맹자”에 실린 아홉 살 적 시절을 회상한 부분을 보면, 어린 박제가가 글쓰기에 얼마나 심취 했었나를 엿볼 수 있는데, 순간 나의 고개가 맥없이 떨궈지는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박제가의 어린 날 추억 상자 속에는 호박 구슬, 깃털, 바가지 배등의 놀잇감도 있었다 하니 우리의 유년 시절에 공통점이 있어 살짝 위로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박제가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친구를 사귐에 있어 시공간을 초월하는 광범위함과 막힘없는 관계의 향연이다. 1737년생 박제가는 이덕무(1741년), 박지원(1750년), 이서구(1754년) 등 나이, 출신에 머뭇거림이 없이 우정을 이어간다. 지금 우리는 사람을 사귀고 만남에 있어 나이, 끌어주고 밀어주는 학연, 지연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한 번은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궁핍한 날의 벗>을 읽고 내 곁에 둔 지 10여 년이다. 책이 크지 않아 여행길에 자주 챙겨 가곤 한다. 긴 이동 시간에 나는 나의 지난 시간 속, 내 맘속 친구들이 불쑥 한 명 두 명 나타나 마주할 때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친구이기도 하고, 오래 연락이 끊겨 아직 찾지 못한 절친도 있고, 새댁 시절 김치 담그는 법을 직접 가르쳐 주던 이웃사촌들도 있다. 나의 사람들이 그리운 날에 습관처럼 이 책을 꺼내 벗에 관한 부분을 읽곤 하는데, 헛헛한 나의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내 담당 주치의 노릇을 아직까지 톡톡히 해 주고 있다

박제가가 써 내려간 ‘벗’이란 이러하다.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 곤궁할 때 사귄 벗을 말하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할 일을 꼽습니다”

“손을 맞잡고 노고를 위로할 때에는 반드시 친구가 끼니라도 제대로 잊고 있는지, 또 탈이 없이 잘 지내는지를 먼저 묻고 그 뒤 살아가는 형편을 묻습니다”

“어떤 때는 친구 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안부를 묻고 하루 종일 아무 말없이 베개를 청하며 한잠 늘어지게 자고 떠나기도 합니다”

박제가가 말하는 궁핍함이라는 게 꼭 경제적 부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리라. 부족함 투성인 우리를 알고 채워주는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서로의 벗이 될 준비 자세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즐겨 읽는 벗에 대한 글귀 몇으로 책 소개를 끝맺는다.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함께 보며 누구와 함께 들으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맛보며 누구와 함께 냄새 맡으며 장차 누구와 함께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함께 보고 함께 듣고 함께 맛보고 냄새까지 함께 맡는다. 그리고 마침내 지혜와 깨달음까지 함께 나눈다. 그게 친구라는 거다. 
-연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이탁오-

박민주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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